초록지붕의 앤, Anne of Green gables

그러니까 빨간머리 앤.

이 이름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단 한 번도 궁금해 한 적이 없었다.

난 어린 시절엔 늘 남자아이에 가까운 취향과 취미를 가졌었고

그래서인지 너무나 소녀스럽다고 생각한 '빨간머리 앤'이라는 이름에 궁금증을 가진 적이 없다.

스무살이 넘어가면서부터 핑크색을 처음으로 좋아해봤고, 레이스와 인형도 좋아해보기 시작했다.

난 그런 내가 좋았다. (애초에 그런건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지만) 여성적이지도 남성적이지도 않고 그냥 나인 것이.

가끔 어떤 사람들은 날 보고 중성적인 매력이 있다며 칭찬했는데, 아마 그냥 나답다는 칭찬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오, 이럴수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빨간머리 앤을 이제야 알아봤다니.

내가 아는 가장 포근하고 다정한 언니가 내게 선물해줬던 책 <빨간머리 앤>.

사실 너무나 내 취향이 아니라서 어떻게 읽을지 난감했는데-

그래도 언니가 선물해줬다는 사실만으로 꼭 읽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보관해두던 책.

그 언니가 자꾸만 생각나는 즈음(결혼 직후)에 읽기 시작했다. 느린 속도지만 꾸준히 조금씩 읽었다.

서너장 읽다보니 흥미가 생겼다. 그리고 넷플릭스 빨간머리앤이 궁금해졌다.

영상은 내 상상력을 모조리 집어삼키고 모든 소설의 이미지를 각인시킬 게 뻔하기 때문에 책을 먼저 읽으려고 보고싶은 마음을 꾹꾹 참았다.

그러다... 결국 못참고 넷플릭스 빨간머리앤을 시작해버리고 말았다.

하하하 거의 내달리다시피 보았다.

처음에 너무 조잘거리는 앤이 짜증나기까지 해서 정말 완벽한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내 강력추천으로 엄마에 아빠까지 빨간머리앤에 푹 빠져있다.

나는 시즌3 끝까지 정주행을 마치고

다시 책을 읽고 있는데- 황홀한 대사들을 곱씹고 천천히 음미하는건 정말 좋지만

영상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아서 도무지 다른 상상력을 발휘하기가 어렵다.

매슈가 마릴라의 동생이 아니라 오빠라는 것도 낯설기만 하다.

그게 가장 아쉬운 점이지만, 아무튼 빨간머리앤을 알게 된 것이 2020년 멋진 수확 TOP10에 포함될거다.

 

마릴라 아주머니는 가끔 꼭 우리엄마같다.

고지식하고 변화를 두려워하고 단호하고 엄하지만,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알게되었을 때 진심으로 사과하며 배우는 모습이.. 그랬다. 잘 가르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 엄마가 떠올랐다.

 

상상력 폭발하는 앤은 나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어줬다.

내 주체할 수 없는 상상력이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증이라도 받은 기분이다.

내 상상력에 대해서만 글을 쓰래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열심히 밑줄을 그어가며, 희망을 품으며

책을 읽어나가야지.

그 다음 앤들도 벌써 너무 읽고 싶다.

(애이번리의 앤, 레드먼드의 앤, 윈디 윌로우즈의 앤, 꿈의 집의 앤, 잉글사이드의 앤, 무지개 골짜기, 잉글사이드의 릴라, 앤의 추억의 나날까지 몽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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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슬픈 세상의 기쁜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