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프리랜서 활동가로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내가 하고싶은 일들을 잘 펼쳐나가기 위해

머릿속에만 있던 아이디어를 적어서 정리했고

각각의 아이디어마다 구체적인 살도 붙이며 기획을 해나갔다.

어린이나 교육과 관련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 중 꽤 오래 생각했던 것들을 

변형하고 조합해서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시작해봤다.

 

아무것도 못하고 흐르는 시간이 너무 답답해서

이번 주에는 되든 안되든 내 생각을 알려봐야지.

결과가 처참해도 해보기 전엔 몰랐던 것을 알게된다는 것에 기뻐해야지!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아파트 엘레베이터에 

10주간의 '말랑말랑 공부방'을 열 계획이라고 광고를 만들어 붙였다.

여기서 할 수 있는 공부(글쓰기, 책읽기, 말하기 공부 등)를 소개하고

간단히 나를 소개했다.

코로나19로 휴교가 길어지면서 힘들어하는 학부모도 많이 봐왔기에

돌봄을 위해서라도 연락이 오지 않을까 했다.

 

3일이 지났지만 아무에게도 문의조차 오지 않았다. 

추측해보건데

1. 우리 아파트엔 어린이가 별로 없고

2. 우리 아파트엔 이런 돌봄이나 교육이 필요한 이가 없고

3. 내 정보가 부족해서 선뜻 문을 두드리기 어렵고

4. 뭘 하는지 꼼꼼한 커리큘럼을 몰라서 / 교육의 질이 의심되어서

이런 이유로 연락이 없었을 것 같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기쁘게 마음먹고 광고를 떼어냈는데,

돌아와서 한참을 생각해봐도 다시 아이디어를 내기가 어렵다.

 

마을 소식 밴드에 '모두 모여라!'하기도 어려운 코로나 시대인데다,

내가 가진 마땅하고 좋은 공간이 없으니

내가 있는 곳(우리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보자고,

그렇게 알려서 조금씩 반경을 넓혀가보려는 계획이었는데...

 

다시 막막해졌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싶어 하면서도 그다지 적극적인 자세는 아닌 것 같다.

학교에서의 좋은 프로그램, 유명한 학원, 기관에서 여는 좋은 프로그램 등에는 관심을 가지는데

아직 나같은 시도는 낯설어서 그런 것일까?

도대체 학교도 공간도 소속도 없이, 나를 어떻게 알리면 좋을까?

다시 생각해봐도 어딘가에 속하지 않고 동네 프리랜서 활동가로 있는 것이 나의 길인 것 같은데

시작이 어렵다.

 

아무도 아이들을 내게, 내가 여는 프로그램에 맡기려/참여시키려 하지 않으니

진짜 내가 내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인가 싶기도 하다.

곧 우리동네에 새 도서관이 개관하는데, 그 때 도서관을 통하면 방법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내 아이를 낳는다면, 내 또래가 있을까? 공동육아가 가능할까?

주변에 아무리 둘러봐도 나와 비슷한 온도와 색감으로 아이들과 함께 살아보고자 하는 이를 찾기 어렵다.

나름대로 삶의 방향이 명확한 분들은 아이를 키우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도 없어보인다. ㅠㅠ

(그래서 누군가와의 함께 교육이 별로 필요해보이지 않는다. 집에서 원하는 만큼의 교육이 이뤄지는가)

 

내 아이디어들 정말 반짝이는데!

어디에 어떻게 펼쳐놓아야 쓸모가 생길까!

Posted by 슬픈 세상의 기쁜 인간
서랍의 낙서들2020. 9. 14. 05:08

일자리도, 농업시설 지원도 아니고

집!

 

집을 저렴히 임대해주거나 마련해준다면

누구라도 살아볼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일자리를 주면, 그 일자리만 보고서 살 곳을 결정하나?

그 청년이 원하는 일자리가 아니라면? 그래도 그 일을 해야하나?

 

농사를 짓고 싶은 청년에게

청년농에 관한 정책과 혜택들을 펼쳐보이며 마구 유혹하지만

사실 집도 없이 덜컥 농사짓겠다고 와서

농사가 잘 맞지 않는 것을 알아버리면?

농사에 실패해버리면?

아니 지원해주는 시설들을 설치할 땅조차 없다면?

일단 집이라도 있으면 알아보러도 충분히 다니고,

실습을 해도 충분히 할 수 있을거다. 

 

정말 자연을 가까이하고 싶어서 농촌을 찾는 사람들이

마땅히 머물 곳이 없어 헤매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프다.

누구보다 여기를 사랑해줄 이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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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슬픈 세상의 기쁜 인간
서랍의 낙서들2020. 9. 12. 19:00

 

 

산내에서 만난, 비슷한 문제를 겪은 또래 친구들이"그렇게 고통스럽고 자꾸만 떠오르고 불편한 시간들이 괜찮아지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일거야." 라고 위로해주었다. 그게 정말 위로가 되었다. 어떤 식으로든 상대측의 해결(을 위한 노력)을 기대할 수 없는데, 그 문제로 오랫동안 괴로워하고 있는 내가 억울했기 때문이다.

 

아마, 아주 서서히일지도 모르지만 그 공동체의 문제는 점점 더 또렷히 드러날 것이고, 감추고 덮는 것이 한계에 닿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나같은 사람, 친구들 같은 사람들은 차곡 차곡 쌓여가겠지. 스쳐가는 사람은 그저 스쳐간 그 뿐이지만, 나같은 사람은 무언가를 품고 있는 사람이니까. 때가 되면 말할 기회가 오겠지. 아니면 누군가 무언가 그 말을 대신할 날이 오겠지.

 

그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더라도, 내가 그 공동체와 같을 수는 없으니까. 적어도 더 나은 삶을 만들며 살 수 있겠지. 적어도 같은 종류의 부끄러움을 스스로 만들며 부끄럽게 살지 않겠지. 부끄러움은 그 공동체의 몫인 것을. 

 

공동체는 너무나 두껍고 단단하지만, 사실 그걸 구성하는 건 너무 가벼운 모래들이었다. (모래들아 미안.) 건드리면 부서질 관계들 뿐이었던 것 같은데. 친구들의 질문이 오래 남았다. "누가 그렇게 힘들게 한 지 모른다. 그 공동체는 나를 힘들게 했는데, 그 공동체의 누가 나를 힘들게 한 건지 모르겠다." 

 

산내 친구들도 나와 너무도 닮은, 그런 고통을 겪었는데, 미안하고 아이러니하지만 너무나 부러웠다. 함께 겪는 이가, 마음을 모을 이가 여럿이라니! 멀리서 마음으로 함께하는 이웃-이 되고 싶었다.

 

내가 흘린 눈물만큼 그 공동체가 부끄러움으로 몸부림치면 좋겠다. 모든 아픔을 외면하고 적당히 넘기며 자신있게 사랑과 평화를 말하고 있는 그들이, 천천히 오래 많이 아팠으면(서서히 부끄러워 결국엔 견디기 힘들면) 좋겠다. 내 눈물을 내가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까지, 계속 울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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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슬픈 세상의 기쁜 인간

"너희가 어려서 그래."

"다 너희를 위한거야."

"나중에 크면 다 알게 될 거다."

"그렇게 안 해서 사고 치면 내 책임이야."

 

대부분의 차별 금지 사유는 벗어나기 어려운 정체성을 포함하고 있는 데 반해, '학생'이라는 처지는 일정 나이를 먹으면 자연적으로 벗어나게 되는 정체성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이나 학생 때 경험한 인권 침해를 '그 때는 그럴 수 있는 것', 때로는 '그 때는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 있습니다.

 

어린이, 청소년, 학생 - 모든 사람이 일정기간 경험하는 사회적 신분.

= 미래를 위해 현재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

 

'인권'이란 '자격을 묻지 않고 보장하는 인간으로서의 권리'

 

최규석 만화 <송곳>의 예시.

"패배는 죄가 아니요! 우리는 벌 받기 위해 사는 게 아니란 말이요!"

많은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위험한 노동환경에 처해있는 원인을 그러한 곳에 투자하지 않는 사업주가 아닌 자신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탓으로 돌립니다. 자신이 공부를 못하고 대학을 못 갔기 때문에 열악한 환경에서 목숨을 걸고 일해야 하는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죠. 주인공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어린이 청소년 시기, 인간의 존엄을 경험하지 못한 문제는 '고통에 대한 무감각'으로 이어진다. 고통은 일상적인 것이며,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치부되니까.

 

학창시절 동안 겪은 폭력은 낭만화되고, 그 폭력은 사회에서 더 많은 모욕을 겪을 것에 비하면 겪을 만한 일,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연습하는 일이 됩니다.

 

"나는 인간이라는 자각"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 이 질문은 '나는 인간이라는 자각은 어떻게 지워지는 것일까요?'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 감각은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할 때,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았을 때 존재를 드러냅니다.

(회복을 위해서는 비교 가능한 다른 공간에서 존중을 받는 경험이 필요하고, 불쾌감을 곱씹을 여유가 있어야 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내린 결론에 대해 공유할 동료가 있어야 한다.)

 

학창시절, 대다수의 시간 동안 신체가 통제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이 사회가 누구에게나 살 만한 사회인지, 생산성 향상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Posted by 슬픈 세상의 기쁜 인간